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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천부사상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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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소개

설립자 소개

  설립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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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박동호 (1897 1991)

 

- 출생 : 1897 년 함경북도 청진 출생

 

  천부경 연구와 보급에 평생을 바친 '천부경 성자 '로 알려짐,  1990 단수일도학회 재단 설립을 추진하다 ” 95세로 타계

  삶과 죽음을 통해 홍익인간 정신을 실천하며 , 재산을 학회에 기부


    주요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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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부경 연구

  - 계연수 선생 후 천부경 암각을 직접 확인 (1948년 묘향산 )

  - 천부경 81자의 진리를 공자 ·노자 ·석가 ·예수 4 성의 가르침을 아우른다 고 해석

  - 하루에 천부경을 여섯 번 염송하는 구도자적 삶

 

2. 한의학 및 동서의학

  - 935 년 한의사 활동 시작 , 동서의학 결합 저서 동서의학요의 간행

 

3. 교육 및 인도주의

   - 6·25 이후 함경도 고향에 관북대학 설립 추진 , 대전거주 시 절약과 나눔 실천

   - 1990 7 11 , 유언 공증을 통해 시신을 서울대 의과대 해부 실습용으로 최초 기증

 

4. 사회문화 공헌

  - 1985 년 서울 사직동 단군성전 설계비 3천만 원 기부

  - 묘향산 ·경주 · 퇴계원 등지에 천부경 석각비 ·제단 건립

 

5. 단수일도학회 설립

  - 990 , 박동호 선생은 천부경 연구와 전파를 위해 재단 설립 추진하다 95세로 서거


    삶의 궤적


한국적 전통인 단군사상과 동학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수암 박동호 선생이었다. 그는 특히 단수일도학회를 만들었는데 단수는 바로 단군과 수운이라는 의미이다. 즉, 단군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한 인물인 동학의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를  지칭한 말이다.  박동호 선생은 이와 같은 단군사상을 오늘의 의미로 구체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인 수운 최제우를 들어 그 사사의 현재적 의미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항상 허름하고 검소한 차림새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에 기가 넘치는 풍모, 그리고 해박한 고전지식과 놀라운 기억력, 겸손하면서도 바위와도 같은 신념으로 후진교육과 인술, 그리고 천부경 연구로 평생을 바친  일수암 박동호 선생. 그는 참 단군인이었으며 참 동학도였다.  박동호 선생은 1897년 월 2일 함경북도 청진시 용향동에서 초시에 합격한 한학자인 아버지의 4남매 가운데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초시에 합격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관계에 진출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서 였을까, 평생을 고향에서 서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한학과 함께 한의학을 공부해서 1927년(31세)에 도의강이라는 연수과정을 거쳐 1934년(38세) 의생면허를 취득해 청진에 수남한의원을 개설하고 한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의학교재로 사용되던 “동서의학론”을  더욱 보강해서 편저서를 내기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한의학  지식을 습득한 뒤였다. 광복 직후에는 고향인 청진에 후진양성을 위한 관북대학 설립을 발기해 개교에까지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평생 지향한 후진양성의 꿈의 일단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관북대학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규명 되지 않지만 그가 이미 그 당시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확인된다. 박동호 선생이 단군을 알게 된 것은 35세 때 만난 만호 이상규 선생을 통해서 였다. 당시 박동호 선생은 동학을 개칭한 천도교의 교인으로 수운 최제우가 만든 동학을 열심히 신봉하는 천도교 동덕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상규 선생은 [천부경 주해]라는 책을 전해 주었고 그 책을 통해서 비로소 단군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천부경 주해]를 접하면서 한민족 고유문화의 위대성을  깨달아 단군역사에 심취하여 민족학 연구에 몰입하게 된다. 


따라서 박동호 선생은 기본적인 한학 지식에 실용적인 한의학 그리고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민족사상과 정신의 기원인 단군사상을 섭렵하는 보기 드문 학자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박동호 선생은 1975년에는 동서의학의 결합을 통한 민족의학 발전을  주창한 “동서의학요의”를 편집,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편 직업으로서의 한의사업은 서울과 퇴계원 그리고 경주에서 한의원을 차려서 활동하였으며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서울시 한의사회 이사, 한의사 자격시험 출제위원을 역임하는 등 꾸준히 한의사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공식적인 한의사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그의 이러한 노력은 훗날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의사를 통한 인술을 펴는 가운데에서도 민족사상의 연구와 계승만이 우리 겨레가 사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천부경>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1990년 6월 ‘단수일도학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단수일도학회는 단군과 수운의 도는 하나라는 의미로 우리 민족 최고의 이념과 사상의 정수를 단군과 그리고 단군을 현재화한 수운 최제우에게서 찾는다는  의미의 학회였다. 


박동호 선생의 평생의 꿈인 단군이 이상한 세계를 현재화한 수운의 도를 계승해 민족정신과 사상을 하나로 묶어내어 민족의 지침이자 세계 공영의 초석이 되고자 만든 단수일도학회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박동호 선생은 단수일도학회를 장기적으로는  민족대학으로 이어지려는 포부를 가지시고 평생 모은 재산은 모두 이 사업에 쓰기로 작정하고 “단수일도학회재단” 설립을 추진하였다. 재단 설립은 위한 재원은 박동호 선생이 그동안 아끼고 모은 전 재산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아무리 먼 거리를 가더라도 언제나 일반버스를 타고 다녔으며 종이를 아끼기 위해 담배 갑 속의 은박지, 달력 뒷면을 이용해 메모를 하고 허드렛물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근검절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연로하셨고 주변에는  그를 돕고자하는 양심적 의인보다는 비양심적 악인들이 더 많았으니 선생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1991년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시었다.